본문 바로가기

여행

우암사적공원

전통 한옥의 조용한 정원 느낌? 아니면 고궁 속의 고즈넉한 연못? 두 가지의 감동이 다 살아 있는 이곳은 대전시 동구 충정로 53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우암사적공원이다. 동구 주민을 비롯한 대전 시민들이 즐겨 찾는 도심 속 힐링쉼터가 아닐까 싶은 곳이다. 해서인지 대전에선 동구 9경 중 6경으로 손꼽고 있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더더욱 '우아한' 산책과 '나 홀로' 명상이 어울리는 곳이다. 물론 연인과의 '달달한' 데이트를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인 장소라는 첫인상이 들었다.

정문 우측의 널따란 주차장에서 차를 내려서 일대를 천천히 둘러보는 맛도 나쁘지 않다. '대소 인원 개 하마'라고 쓰인 하마비가 있음은 이곳이 성역임을 뜻하지 않는가? 조심스럽게 외삼문을 통과한다. 옷매무새도 살짝 체크하면서. 그런데 우암이라면 혹시 그분의 호를 말함인가?   

남간정사

외삼문을 지나고선 앞선 일행이 가는쪽으로,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발걸음은 자연스레 따라간다. 역시나 얼마 안 가서 '뭔가 있을법한 건물'이 눈앞으로 펼쳐진다. 남간정사. 여기는 조선조 유학자 우암 송시열 선생이 말년에 학문을 닦으며 제자들도 가르쳤다는 건물이다. 정면으로 4칸 규모의 팔작지붕인데, 특이한 것은 그 아래로 시냇물이 흐를 수 있도록 한 점이다.

지금은 메말라 있는 모습이나 비라도 내린다면 제법 운치 있을 것 같다. 당연스럽게 남간정사 건물 앞으로는 커다란 연못이 조성되어 있어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사색도 즐겼을 우암 선생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느티나무인지 회화나무인지 수종은 확실치 않으나 주변의 고목들도 조화롭게 자라고 있어 한층 이곳의 역사와 유래가 엄숙해져 온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조 임금 시절(40년)에 태어나 숙종 임금 때(15년)까지 병자호란과 기사환국이라는 정치적 대변환기를 몸소 겪으며, 이조판서와 좌의정까지 역임했던 그. 27세 때 생원시에 장원을 하면서 명성을 알리게 되었고 그 2년 후인 1635년에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의 사부로 임명되면서 서로 간에 장차 깊은 유대를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의 치욕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낙향하여 10여 년간 은둔하다시피 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벼슬길에 다시 나선 그는 효종의 북벌 의지 속에 그 중심인물로 발탁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1659년 효종이 급서 하면서 다시 낙향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재야에 있으면서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이는 선왕과의 돈독한 관계와 사람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예송논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서인들의 패배로 예를 그러친 죄목으로 파직, 삭출되었고 유배길에도 올랐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대시 집권하면서 중앙 정치무대에 복귀하였다. 1689년 1월, 운명의 해가 밝았다.

숙의(장희빈)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자 원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면서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는데, 이때 세자 책봉에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한양으로 압송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유물관

'환국'으로 일어서고 또 '환국'으로 생을 마감한 우암 선생의 일생과 유물에 대한 추가적인 공부는 유물관이 딱이었다. 마침 해설사 선생님이 친절하고 재치있는 입담으로 일행을 반겨주었다. 일행들이 집중하는 모습을 뒤에서 담아 보았다. (코로나 탓으로 현재는 출입 불가)

"군신의 사이는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이 귀하니..." 위 사진 속의 글은 효종이 신하인 우암에게 쓴 편지들이다. 친필은 아니고 베껴둔 것인데, 효종은 우암과의 독대를 주변에서 불편해 하자 아예 세자를 시켜 편지를 직접 전달케 했다는 설명이 있었다.  유물관을 나와 마치 서원 같아 보이는 건물, 그 출입구인 명정문을 들어선다. 

'모든 일을 명확하게 하고 마음을 맑게 하라'라는 메시지를 담은 곳, 명숙각과 '모든 괴로움을 참아야 한다'란 인함각을 좌우로 둔 큰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마음을 곧게 쓰라는' 의미의 강당, 곧 이직당이라고 했다. 

이직당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한 바퀴 둘러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직당과 명숙각(좌)과 인함각(우)

이직당 뒤로도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라는' 심결재, '선현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라'는 견뢰재, 남간사(사당) 등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돌아오다 다시 보니 이직당 자리는 명당이지 않나 싶었다. 한편 이직당 너머로는 고즈넉한 연못이 자리하고 있는데 잠시 사색이나 명상에 잠기게도 해주었다. 벤치에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져 보는 것도 좋아 보였다. 어디 확인해 보자.  

덕포루 앞 정자. 너무 공부에만 매달리면 이또한 오래가지 못할 일 아니던가? 문화유산 답사길에도 적용되는 말이지 싶었다. 전망 좋은 곳, 덕포루 누각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좋으니 꼭 들러보시길 추천한다. (아쉽게도 덕포루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우암선생에 대한 회상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분명 시사점이 있고, 또 주변 풍광을 바라보며 자연과의 친화력도 업(Up)시킬 수 있음 또한 이곳 우암사적공원에서 체감하는, 서로 간에 조화로운 모습이 아닐까 싶다. 마침 자연을 노래하기 좋은 가을도 되었다.  

드넓게 조성된 주차장으로 나오면서 되돌아 본 우암사적공원의 모습이다. 우거진 숲과 파란 하늘이 제법 조화롭다. 우리 삶에도 분명 이런 하모니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4호

남간정사엔 여전히 사람들의 인증샷 행렬이다. 

배롱나무! 우암 선생이 심은 것인지? 목백일홍이 연못과 남간정사와도 잘 어울려 보였다. 우암사적공원을 나서며 바라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우암사적공원 정문 출입구

가을날에 '나홀로' 산책하기 좋은 곳, 연인과 함께 '둘이서' 다녀가기도 좋은 고즈넉한 곳, 가족끼리 함께 와서 '따뜻한' 대화를 나누기에도 좋을 곳이 대전시 동구 우암사적공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