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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서대문독립공원 독립문

조선은 그저 밥상이었다! 189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조선 전역의 광산 채굴권, 철도 부설권, 전화나 전차 부설권, 삼림 벌채권 등이 수도 없이 외세에 넘어갔다. 여기서 외세란 일본뿐만이 아니었다. 러시아(압록강과 두만강 삼림 벌채권, 함경도 종성과 경성의 광산 채굴권), 미국(평안도 운산 금광 채굴권, 함경도 갑산 광산 채굴권, 한양의 전화와 전차 부설권)은 물론이고 독일(강원도 금성 금강 채굴권)과 영국(황해도 수만 금광 채굴권)도 합세했다. 물론 노른자위는 일본(경인선, 경의선, 경부선, 경원선 철도 부설권, 전라도 직산 금광 채굴권)의 차지였다. 당시의 강대국들인 이들 외세는 약소국 조선에 들어와 막대한 경제적 이권을 차지했던 것이다. 각국이 이권 사업을 벌일 때 조선은 그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땅이며, 기계며 노동력 등을 헐값에 제공했다. 그러니 개발비를 거의 들이지 않고도 마음껏 이익을 낼 수 있었으니, 조선은 그들에게 너무나 매력적인 곳이었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었던 조선 정부는 '퍼주기'식으로 특정 국가의 독점을 막기 위해 여러 나라에 이권을 넘겨주고야 만 것이다.

독립문(정면에서 바라 본 모습)
독립문(뒤에서 올려다 본 모습)

자주와 독립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급기야 정치, 사회는 물론 경제 분야까지 온통 외세에 휘둘리게 되자 급 화두가 된 것이 '자주'와 '독립'이었다.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주장했던 '개화'나 '개혁'이라는 숙제가 한 발 물러선 형국이 되고 말았다. 개화파 중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던 서재필이 10여 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와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된다. 한글로 쓰인 국문 3면과 이를 요약한 영문 1면으로 발행하다가 국문판, 영문판을 따로 발행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신문 창간 비용을 대주고, 정부의 건물도 빌려 주는 등의 지원을 한다. 독립신문에서 서재필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산업을 발전시켜야 하고, 백성들 모두 교육을 받아 무지함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신문>의 활동은 그해 7월 독립협회라는 단체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서재필과 함께 활동하던 개화파 지식인들, 정부 관리들이 두루 참여한 독립협회가 제일 처음 한 일이 바로 독립문을 세운 것이었다.

서재필 동상

독립협회와 독립문. 원래 영은문('은인을 맞아들인다'는 의미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왕실에서 나가 맞이하던 문으로 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상징하던 문, 1895년 2월에 철거)이 있던 자리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1897년 11월 20일 건립한 문이 바로 독립문이다. 건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모금활동도 했는데, 돈을 내면 누구나 독립협회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영은문이 헐리고 남은 주초(사적 제33호) 2개 뒤로 높이 14.28m, 너비 11.48m 크기로 우뚝 서 있는 독립문! 일정한 크기의 화강석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세워진 이 문은 한양도성 성벽 쌓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형식이다. 중앙에는 홍예문(무지개 모양의 문)을 두고 그 좌측 내부로는 정상으로 통하는 내부 계단이 있다. 정상부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홍예문의 이맛돌에는 오얏꽃(이화) 문장이 새겨져 있고, 그 위의 앞과 뒤 현판석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고 좌우측으로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1963년 사적 제32호로 지정). 

서대문 독립공원과 독립문. 사진 속 현재의 독립문은 지난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원래의 장소에서 북서쪽으로 약 70여 미터 이전을 해서 다시 세운 것이다(1980년 1월). 독립문이 처음 세워진 지 약 120여 년이 흐른 지금 이곳은 인근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과 더불어 '서대문 독립공원'이란 이름으로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당시 독립협회를 이끌었던 송재 서재필의 동상도 함께 자리해 있다. 외세에 휘둘렸던 안타까운 역사 위에 세워진 자주와 독립의 현장이면서 또 서울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문 사거리를 지날 때면 "우리나라의 독립을 더 이상 외세에 의존하지 않겠다"던 그와 그들의 다짐이 들려오는 듯하다. 한편 대로 맞은편 무악동 쪽(일명 옥바라지 골목)에는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이라는 곳이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