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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고인돌은 과연 누구의, 누구를 위한 무덤이었나?

고인돌은 크고 넓적한 바위를 큰 돌 몇 개로 받쳐놓은, 역사시대 이전인 선사시대의 무덤을 말함이다. '고여 있는 돌', '고여 놓은 돌'이라는 의미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한자어로는 '지석묘'라고 하며, 이 '지석' 역시 '뚜껑돌을 고이는 받침돌'이라는 뜻이다.  고인돌을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재료는 역시 커다란 돌이다. 특별한 기계나 장치도 없었던 그 옛날 선사 시대엔 도대체 어떻게 그리 큰 돌을 구해다 옮겨서 고인돌을 만들었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중 하나이겠다. 고인돌의 뚜껑돌은 자연 암석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큰 바위에서 일부를 떼어내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렇게 구한 돌을 지렛대 등을 이용해서 혹은 사람의 힘으로 끌거나 해서 운반했을 것이다. 전라북도 진안 여의 곡 주변에선 약 200미터에 이르는 운반로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돌을 옮기고 나면 받침돌을 두 개에서 네 개 똑같은 높이로 세우고, 그 높이만큼 흙을 쌓아 작은 언덕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언덕 위로 뚜껑 돌을 밀고 끌어서 올린 다음 받침돌까지 쌓았던 흙을 치우면 완성되던 게 바로 고인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만들었던 고인돌이 과연 누구의 무덤인지 또는 누구를 위한 무덤이었는지 궁금해진다. 오늘 문화유산 답사는 이 고인돌을 찾아 떠나 보도록 하자. 

강화 고인돌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만 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전 세계 고인돌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개수라고 한다. 그 특징도 다양해서 북방식과 남방식 고인돌로 구분하고 있다.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시신을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 북방식은 시신을 땅 위에 두고, 남방식은 땅 속에 묻는다는 점이다. 북방식은 비교적 넓고 평평한 판돌을 땅 위에 세워 네모난 상자 모양의 방을 맞춘 다음, 바닥에 시신을 안치하고 그 위에다 뚜껑돌을 덮은 것이다. 이 모양이 탁자 모양과 닮아 '탁자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면에 남방식은 땅을 파고서 방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넣은 것이다. 그 위에 작은 받침돌을 여러 개 놓고 다시 커다란 뚜껑돌을 얹는 것이다. 그 모양이 바둑판과 비슷해서 '바둑판식'이라고도 부른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우리나라의 고인돌 중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은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밝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창 고인돌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 고인돌 442기가 있다. 화순의 고인돌 유적은 보존 상태가 좋고 고인돌을 쌓는 과정을 보여 주는 채석장이 발견되어 그 당시 석재를 쌓은 기술과 운반 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강화 고인돌 유적은 해발 100~200미터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고, 길이가 약 7미터에 높이 2.6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고인돌이 있다.    계급 사회로의 전환을 알리는 지표. 신석기시대만 해도 사람이 죽으면 발조차 뻗을 수 없는 공간에 묻고, 세월이 지나면 그 위에 또 다른 시신을 묻곤 하였다. 그런데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 만들기도 힘든 이 고인돌을 만든 이유가 뭘까? 고인돌의 주인은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일할 수 있도록 명령할 수 있는 권력자이거나 그런 힘든 일을 시킬 만한 부자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즉 고인돌이 세워진 청동기 시대부터 사회는 소유한 재산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른바 권력자들은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생전의 세력을 계속해서 자랑하려고 했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계급은, 상류사회는 무언가 '뽀대 나는 것'들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