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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주인을 알 수 있는 무덤, 무령왕릉

경주나 부여 등 삼국시대의 옛 도읍지에 가면 지금도 그 시대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옛 왕들의 무덤은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다만 안타까운 점이라면 대부분의 무덤이 그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란 사실이다. 무덤의 실제 주인공을 알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고, 그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인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령왕릉은 특별한 무덤이 아닐 수 없겠다. 옛 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무덤. 백제의 옛 서울이었던 공주와 부여 지역에는 왕들의 무덤이 여럿 남아 있고, 대부분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무덤이 대개 출입구가 있는 굴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 입구만 발견하면 무덤 안으로 쉽게 드나들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다보니 무덤의 주인이나 그와 함께 묻힌 그 시대의 소중한 물건들을 누군가가 죄다 훔쳐가고 지금은 빈 무덤만 남아 있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신라에 멸망을 당한 데다가 우리 문화재를 송두리째 빼앗아 간 일제의 약탈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이다. 그런데 예외가 하나 있다. 빈 껍데기뿐인 여타 무덤과는 달리 무덤 안에 옛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그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혀주는 증거가 명백히 남아 있는 유일한 백제 왕의 무덤이 지난 1971년에 발견되었다. 이것이 바로 무령왕(462~523)의 무덤이다. 오늘은 바로 그 무령왕릉을 찾아가 본다.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강을 빼앗긴 이래 가장 크게 세력을 떨쳤던 시절인 성왕(?~554) 대에 만들어 졌다. 그래서 무덤도 아름다운 벽돌로 정성껏 지었고, 껴묻거리도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백제에 유입된 새로운 무덤의 양식으로 백제의 대외교류를 통한 문화 수용과 그 활용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무덤에서 발견된 화려한 백제 유물. 무령왕릉에서는 총 4,6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전체 유물은 왕과 왕비의 목관 안에 있던 장식품과 바깥에 두었던 부장품, 그리고 의식과 관련된 용구로 구분되는데, 하나의 유적에서 드물게도 무려 12종류의 유물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 가치에 대한 대단한 인정이 아닐 수 없다.

무령왕릉 내부 모습

그중 '지석'이라는 유물은 이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임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 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지석은 무덤을 만들려고 땅의 신에게 이 땅을 사들였다는 기록을 새겨 놓은 넓적한 돌판이다. 또 왕의 죽음과 그 장례에 대한 간단한 기록(한자)과 왕비의 묘지문이 새겨져 있었다.

석수

무령왕릉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석수, 즉 돌짐승을 만나게 되는데, 돌짐승은 입구에서 밖을 향해 서 있어 잡귀를 잡아먹는 역할을 했다. 얼굴과 몸 전체가 퉁퉁하고 다소 투박한 인상을 준다. 족좌는 왕의 다리를 받치는 받침대로 목관 안에서 발견했다. 윗부분이 넓고 아랫부분이 좁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중간 부분을 3자를 뉘어 놓은 모양으로 만들어 두 다리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했다. 굴식 벽돌 무덤. 즉 굴 모양의 널방(시체를 안치해 놓은 무덤 속의 방)과 널길(고분 입구에서 시체를 안치해 놓은 방까지 이르는 길)을 만들고, 벽돌로 벽과 아치형의 천장을 만드는 형식이다. 무령왕릉의 벽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이는 왕이 연꽃 가득한 불국정토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나무로 틀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올려 천정 부분을 만들었으며, 등잔을 놓으려고 벽의 한 부분을 파서 만든 자리인 등 감을 북벽에 한 개, 동과 서벽에 두 개씩 만들었다(총 5기).

등감

이 등감 안에는 청자 등잔이 들어 있었는데, 타다 만 심지가 안에 남아 있었다. 바닥은 암반을 평탄하게 깎아 낸 다음 그 위에 벽돌을 배열하고 벽돌 사이사이엔 석회를 발라 고정하였다. 무덤 내부는 널방과 널길 그리고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구로 이루어져 있다. 무령왕릉과 같은 백제 벽돌무덤은 외국의 무덤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특수하지만 백제의 무덤 양식에 큰 변화를 주었으며, 사회 문화 전반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의의가 있다. 출토된 많은 유물들은 백제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무령왕은 백제 25대 왕으로, 501년부터 523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이 때 백제는 고구려의 침략으로 처음 도읍지(한강유역)를 빼앗기고, 금강 유역의 공주로 도읍을 옮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무령왕은 이 어려움을 이겨내며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고 무척 애를 썼던 왕이다. 결국 무덤으로나마 후세와 소통하게 된 이가 백제 무령 왕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