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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김홍도의 풍속화 이야기

미인도. 지난 2008년에 개봉한 영화 제목이다. 신윤복과 김홍도를 다룬 픽션 영화인데, 신윤복이 여성으로 등장하고 김홍도와의 러브 라인까지 등장하는 바람에 꽤나 충격적이었다. 제대로 된 기록도 없고 사망 시기도 명확하지 않은 두 사람의 일생에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연출이 나은 해프닝 내지는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김홍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김홍도(1745~)는 18세기 중반에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그는 풍속화의 대가로도 유명하지만 초상화, 산수화, 불교 그림 등 많은 분야에서 아주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예닐곱 살 때 벌써 당대 유명 화가 강세황(1712~1791)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김홍도의 산수화는 강세황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0대에 도화서 화원이 된 김홍도가 솜씨를 가장 잘 발휘한 분야는 풍속화였다. 그가 그린 풍속화에는 당시 백성들의 생활상과 농업, 상업,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일상이 재미있고 익살스럽게 잘 나타나 있으며, 우리 민족 고유의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한 까닭에 단원(김홍도의 호)의 그림 중에서도 풍속화가 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김홍도가 이룩한 풍속화 그리는 방식은 같은 시대의 긍재 김득신(1754~1822), 혜원 신윤복(1758~)에게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 점에서 김홍도가 조선 시대에 풍속화라는 새로운 그림 분야를 개척했다고도 할 수 있다. 김홍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삼공 불환도>, 개성 만월대에서 벌어진 잔치를 그린 <기노 세련계도>, 말을 타고 가다가 꾀꼬리 소리에 멈추었다는 <마상청앵도>, <단원 풍속도첩> 들이 있다. 김홍도 이전에도 조선 후기 풍속화를 이끈 선구자격 화가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공재 윤 두서(1668~1715)와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이다. 윤두서는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당파 싸움 때문에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평생 실학을 연구하며 여가 시간에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린 <나물 캐기>와 <짚신 삼기>는 모두 일하는 백성을 묘사한 것이다. 조영석도 선비 화가로서 <목기 깎기>, <소젖 짜기> 같은 백성들의 일상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러나 이들이 그린 그림도 도화서 화원을 지냈던 직업 화가 김홍도의 그림과 견주어보면 그 완성도나 기술 면에서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그 소재가 무척 다양한 데다 더욱 현실적이며 서민적 체취가 강하게 느껴진다. 윤두서나 조영석이 그린 농부나 일하는 여성은 대상으로서 거리감이 좀 느껴지지만, 김홍도의 풍속화는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특징이 있다. 오늘날까지 김호도의 풍속화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지 싶다. <단원 풍속도첩>은 김홍도가 그린 그림책 형태의 풍속화로, 도첩에는 <서당>, <씨름>, <밭갈이>, <활쏘기>, <행상>, <무동>, <기와이기>, <대장간>, <나들이>, <시주>, <나루터>, <주막>, <고수놀이>, <잎담배 썰기>, <빨래터>, <우물가>, <자리 짜기>, <타작>, <서화 감상>, <길쌈>, <말징박기>, <어장>, <신행길>, <들밥>, <기로 행려> 등 모두 25첩의 그림이 있다. 이 작품들은 1745~1816년(영조 21년~순조 16년)에 그린 그림인데, 대부분 조선 후기 백성들의 생활 모습과 먹고 사는 일 상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이 밖에도 그는 당시 백성들이 즐기던 놀이를 소재로 삼은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래서 오늘날 김홍도의 그림을 통해 당시 백성들이 씨름이나 고누 같은 소박한 놀이를 즐겼으며, 양반들은 그림 감상이나 매사냥 같은 호사스러운 놀이를 즐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대부분 배경 설명을 생략하고, 인물 중심으로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인물에 대한 묘사는 선이 거칠고 굵으며, 힘찬 붓질로 당시 백성들의 생활 감정과 한국적인 웃음을 아주 짜임새 있게 나타냈다. 이로써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면서도 감동은 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 시대 후기에 풍속화를 많이 그리게 된 이유. 풍속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는 그림이다. 선사 시대 암각화와 고구려 고분벽화도 넓은 의미에서는 풍속화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볼 때 풍속화가 가장 발달했던 시기는 조선 후기이다. 조선 후기라면 영조, 정조, 순조가 다스리던 18세기~19세기 초에 해당되는데, 이때 풍속화를 많이 그렸으며 그 소재와 형식도 다양했다.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했던 시기라 백성들도 어느 정도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국가와 왕실 행사 등을 그림으로 그렸고, 백성들의 생활까지 관심 대상이 되어 그림으로 그려지게 된 것이다. 코로나 일상 탓에 제대로 된 운영을 못하고 있던 박물관 미술관 전시장 등이 운영을 재개하면 달려가 다시 보고 싶은 것이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이고 그 그림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그들의 일생이다.  또한 그 시절 우리 조상들의 일상사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