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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국보 제1호 숭례문과 보물 제1호 흥인지문

국보 제1호와 보물 제1호를 만나다. 조선왕조 500년 도읍지 한양, 그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한양도성(서울성곽)에는 모두 8개의 문이 있었다. 4대 문인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과 그 사이의 4 소문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 혜화문이 그것이다. 한양도성의 성문과 성곽은 외적의 침입을 막고 궁궐과 국가의 주요 시설물을 지키기 위함이었는데, 그 축성과정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작업을 감당할 인력을 동원하기도, 물자나 재화를 조달하기도 무엇하나 쉬운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옛 고려의 도읍지인 개경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도읍지를 옮긴다. 그리고 새로운 왕조, 새로운 국가의 위상에 걸맞은 한양도성을 짓게 된다(1396년). 조선의 새 도읍지 서울의 옛 이름은 '한성'이었다. 한양도성은 한성부의 테두리를 따라 지은 '울타리'였던 셈이다. 물론 그 울타리 안에는 조선의 중요 국가 시설이 있었고 왕과 백성들이 살았다. 백성들의 집 둘레로는 논과 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양도성의 각 성문은 성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였고, 유사시에는 적의 공격을 막거나 적을 공격하기도 하는 공간으로 쓰였다. 그래서 통행이 편한 곳에 성문을 만들어 놓아 사람들이 드나들기 쉽게 했다. 한양도성에도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남쪽의 숭례문(남대문), 동쪽의 흥인지문(동대문), 서쪽의 돈의문(서대문), 북쪽의 숙정문(북대문) 이렇게 4대 문을 만들었다. 한성은 풍수지리를 토대로 음양오행에 따라 설계된 도읍지였는데, 각 대문 이름에 들어가는 인, 의, 예, 지, 신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를 나타낸다. 사대문 사이로는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 혜화문의 4 소문이 있어서 한성의 안과 밖을 보다 쉽사리 연결해 주었다. 각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도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개화기에 들어서는 전차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성벽이 하나 둘 헐리게 되었고, 시간을 정해 놓고 성문을 여닫는 일마저 없어지게 되었다.

흥인지문(옹성방향)
흥인지문(정면방향)

숭례문과 흥인지문. 먼저 흥인지문(동대문)은 서울 성곽(지금 기준) 정동쪽에 있는 문으로, 보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동대문을 만들 때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우선 이 곳이 다른 지역보다 지대가 낮은 데다 도성 안의 물이 청계천을 통해서 내려가는 곳과 가까이 있어서 더욱 만들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서울 성곽의 다른 성문은 이름이 다 세 글자인데, '흥인지문'만 네 글자인 것도 글자 한 자를 더 써넣음으로써 낮은 지대라는 그 약점을 보완하려고 했다고 한다. 또 흥인지문 바깥쪽에는 반원 모양의 옹성을 둘렀는데, 이것도 다른 문에서는 볼 수 없는 흥인지문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이렇게 옹성을 두른 것은 적이 쳐들어 왔을 때 효과적으로 방어를 하기 위함이었다. 


흥인지문을 방문한다면 필히 좌측(혜화동 방향) 인근에 있는 [한양도성박물관]에 가 보도록 하자. 한양도성의 축조과정 등 다양한 정보를 둘러보고 또 안내받을 수 있다. 

낮의 숭례문

숭례문(남대문)은 서울 성곽 중에서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서울의 대문 구실을 했던 문이다. 때문에 다른 문보다 더 크고 웅장한 위용을 갖고 있다(1398년 완성). 여러 차례 전쟁의 참화를 겪었지만 조선왕조 500년 동안 원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그러나 지난 2008년 2월, 어처구니없는 방화사건으로 국보 제1호 남대문은 교각만을 남기고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실로 서울성곽 600여 년의 역사의 한 축이 무너진 셈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문들과 달리 '숭례문'이라는 글씨는 세로로 쓰여 있다. '예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뜻에 따라 공손한 자세를 나타내려고 세로로 썼다고도 하고, 서울 남쪽에 있는 관악산의 나쁜 기운을 누르려고 그렇게 썼다는 주장도 있다. 

낮의 흥인지문과 밤의 숭례문

국보 제1호인 숭례문과 보물 제1호인 흥인지문. 국보는 유형문화재 중 유례가 드문 것, 즉 독특하고 희귀한 것에 지정을 한다. 그러나 국보와 보물의 중요성과 가치,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다. 국보급 문화재가 그 분야와 시대를 대표하는 유일무이한 것이라면, 보물급 문화재 또한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