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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조선의 법궁, 경복궁

조선의 첫 궁궐.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1335~1408)는 왕이 되고 나서, 새로운 궁궐을 어디에 지으면 좋을지 고심이 많았다. 여러 곳을 견주어 보다가 정도전 등의 권유로 결국 한양으로 결정하게 된다.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왕이 된 만큼 백성들에겐 권위도 내세우고 싶었을 것이고, 자연스레 고려의 도읍을 벗어나 새로운 집도 갖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1395년 태조는 경복궁을 새로이 짓고 한양 입성에 성공하게 된다. 처음에는 390여 칸 규모로 근정전과 강녕전 등의 건물만 있었으나, 경회루도 짓고 차츰 전각의 수를 늘려 나갔다. 그러다 임진왜란(1592~1598) 때 불이 나는 바람에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다. 재건축 시도가 없지 않았겠으나 워낙 덩치가 큰 일인지라 200여 년간 방치되게 된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고쳐 지어서 궁궐로 다시 사용되게 되는데, 이때 재건축한 경복궁은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7,000칸이 넘었다 전해진다.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대원군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은 조선의 첫 궁궐이자 법궁인 경복궁으로 가보자.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근정문 앞에서

장엄한 근정전과 연회공간 경회루. 경복궁의 중심건물하면 떠오르는 건? 왕의 정치 활동이 펼쳐지던 근엄한 공간, 근정전(국보 제223호) 아닐까 싶다. 왕과 신하들이 회의를 열고 국가 중요 행사를 개최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근정전'이란 이름은 '근면하고 성실하게 나라를 돌보다'라는 뜻인데, 신하들이 왕에게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리거나, 왕의 즉위식 혹은 세자 책봉식 등 대규모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곳이다.  정면 다섯 칸, 측면 다섯 칸으로 목조 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바닥엔 이중으로 단을 만들어 높이 지었는데, 이것을 '기단' 혹은 '월대'라고 한다. 기단의 난간이 꺾이는 곳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수호신과 십이지신상을 만들어 놓았다. 근정전 앞 마당에는 품계석을 늘어놓아 질서 정연하고 다소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주위로는 행각을 둘러싸서 시선을 적절히 차단하는 효과도 마련하였다.

임금이 기분전환 삼아 산책을 하거나 사신 등 손님을 맞이하여 함께 술도 마시며 즐기던 곳, 경회루(국보 제224호)는 좀 더 편안하고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흙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 만든 건물인데, 주위가 확 트여 있어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쐬면서 시를 짓거나 활을 쏘기도 하며 풍류를 즐긴 곳이기도 하다. 경회루에 오르면 인왕산, 남산 그리고 북악산이 한눈에 보이는데, 경복궁 창건 당시 작은 누각에서 태종 때인 1492년, 연못을 더욱 넓히고 건물도 크게 다시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누각이 된 배경이다. 사정전. 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으로 보통 편전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신하들이 왕에게 유교 경전과 역사를 주로 강의했는데, 이러한 제도를 경연이라고 불렀다. 강녕전. 왕이 생활을 하던 공간으로, 휴식을 취하거나, 왕실의 가족들을 면담하거나 또 신하들과개인적으로 편하게 만나는 공간이었다. 용으로 상징되는 왕이 머무는 곳이라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특징이 있다.

흥례문 앞에서

경복궁에서 살았던 사람들. 경복궁에서 지내며 근무하던 관리(남녀)의 수는 대략 얼마나 되었을까? 놀랍게도 궁녀와 내시의 수가 합쳐서 1,000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낮에는 승지(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등 모두 6명) 등 직업관료들과 일하는 사람들까지 드나들었을 테니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던 공간이 바로 경복궁이었던 셈이다. 궁녀는 옷과 음식, 제사를 준비하는 등 왕실의 일상생활을 도맡아 수행했다. 왕에게만 궁녀와 시녀가 150명이나 딸려 있었다 한다. 왕비와 대비, 세자와 세자빈, 세손들에게도 수십 명에서 130여 명에 이르는 시녀들이 있었다 한다. 궁녀에는 '나인'과 그 윗사람인 '상궁'이 있었는데, 품계를 받은 여자 궁녀(궁중 여자 관리)를 통틀어서 '내명부'라고 불렀다. 즉 내명부는 '후궁'과 '궁녀'로 나뉘는데, 후궁의 지위가 궁녀보다 높았다. 성인이 되기 전의 궁녀를 '애기 나인'이라 불렀으며, 20세를 전후해 성인식을 치른 후에야 정식 나인이 되었다. 상궁이 되면 후궁 못지않게 화려한 옷을 입지만 그렇지 않은 궁녀는 남색 치마와 옥색 바탕에 자주 고름이 달린 삼회장저고리를 입었다. 궁궐의 손과 발이 궁녀였던 셈이다. 내시는 왕의 명령을 전달하거나 문을 지키거나 관리의 일을 돕거나 궁궐을 수리하거나 청소를 하는 등, 왕실의 정치와 행정업무를 거들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일했던 공간이라 화장실도 모두 스물세 개나 있었다 전해진다. 세월이 흐르면서 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 경복궁엔 몇 몇 주요 건물만 남아 있다.  조선은 양반, 상민, 천민으로 나뉜 계급사회였다. 사회적으로 맡은 역할도 달랐고 먹는 것, 입는 것조차도 계급에 다라 달랐기 때문에 계급에 따라 쓰는 건물의 이름도 모두 달랐다. 궁궐 내 '전'은 왕이나 신이 있는 곳으로, 가장 격이 높은 건물(전각)에만 붙일 수 있었다. 당연히 건물도 가장 화려하며, 크기 또한 가장 웅장하다. 일반 사찰에서도 '전'은 '대웅전'이나 '대적광전' 등과 같이 부처님을 모신 건물에만 붙인다. '당'은 구모가 비슷하더라도 왕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 쓰거나 일상생활 공간에 붙였다. '경회루'의 '루'는 본래 '누각'이라는 뜻으로, 건물의 모양에 따른 이름이다. 사방이 잘 보이도록 문과 벽이 따로 없고, 온돌이 아니라 땅에서 사람 높이 정도로 높이 지은 건물을 말함이다. 
조선의 첫 궁궐이자 법궁으로 지난 조선왕조 500년을 대변해온 경복궁! 그 정문인 광화문 앞에는 오늘도 내국인은 물론이고 수많은 외국인 방문객들이 찾고 있다. 다들 한복으로 갈아 입고서 말이다. 앞으로 쓰일 역사에서는 부디 큰 복만을 가져다 주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