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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신라금관의 숨은 의미

지금으로부터 약 2000여 년 전 박혁거세가 세운 나라인 신라는 4세기 후반에 이르러 국가의 기본 틀을 갖추게 되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작은 나라였지만 결국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진흥왕, 무열왕, 문무왕 같은 왕들의 노력으로? 신라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 경주에 가면 마치 작은 산처럼 생긴 고분이 눈에 들어오는데 고분엔 중요한 유물도 많이 묻혀있었다. 고분이란 옛날에 만들어진 무덤을 말함인데 그 고분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 때에는 '릉'이나 '묘'로 이름을 붙이고, 반대로 정확히 모를 때에는 '총'이라 하여 대개 그 고분이 발견될 때 나온 유물을 관련시켜 이름을 붙이게 된다. 금관이 발견되어 '금관총', 천마도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른 것이 바로 그 사례이다. 1921년 경주에서 고분이 발굴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금관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고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고, 이에 금관총이란 이름이 붙게 된 배경이 된 것이다. 이곳에서는 꾸미개, 무기, 말 타는 기구 등 4만여 점에 이르는 화려한 유물이 나왔다. 금관총에서 나온 금관은 정면의 가지가 한자 '출'자 모양을 하고 있고 양 옆으로 사슴뿔 모양 장식이 하나씩 세워져 있다.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신라 금관의 바깥쪽에는 얇고 둥근  금판(달개 장식)이 달려 있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짤랑짤랑 흔들리는 구조이다. 그 사이사이에는 비취로 만든 곡옥(옥을 반달 모양으로 다듬어 끈에 꿴 구슬 장식으로 '곱 구슬', '곱은옥'이라고도 부른다) 이 달려 있고, 좌우 양쪽에는 금으로 호화롭게 꾸민 수식(매달아서 길게 늘어뜨리는 물건으로 '드리개'라고도 한다)을 길게 늘어뜨려 아주 화려하고 아름답다. 신라의 왕이나 귀족들은 고구려나 백제와는 다른 모양의 금관이나 금동 관을 썼다고 볼 수 있는데, 신라 금관 장식에는 무슨 숨은 비밀이라도 담긴 것일까? 또 금관에 필요한 금은 대체 어디서 충당한 것일까?

신라금관(국립중앙박물관)

신라 금관들은 대개 크고 작은 나무와 새, 사슴뿔, 금판과 곡옥 같은 각종 장식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이 장식물을 보면 당시 왕들의 힘과 재산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으며, 또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바람을 엿볼 수 있겠다. 신라 금관의 기본 모양은 나무인데, 이것은 신라인들이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숭배하는 민족이었음을 나타내는 것 아닐까? 지금까지 농촌에서 당산나무(마을의 수호신 노릇을 하는 나무)를 정해 두고 돌보는 것도 그런 영향 중 하나인 것이다. 금관에 장식된 새는 금관의 주인공이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릴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임을 말해준다. 곡옥은 영롱한 비취색인데 그 모습이 어머니 뱃속의 태아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신라 왕족의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으리라 짐작한다. 이처럼 신라의 금관은 예술적으로도 아주 아름다운 데다 신라인들의 뛰어난 금세공 기술(금을 이용해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고 꾸미는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신라의 금세공 기술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금으로 만든 허리띠와 거기에 달려 있는 장식품, 허리띠 고리, 금 귀걸이, 금제 뒤꽂이, 금제 관식들이 있다.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 모자는 얇은 금판 여러 장을 붙여 만든 것으로 헝겊이나 가죽으로 된 모자 위에 덧쓰는 모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 새 날개 장식도 유명한데, 경주 금관총에서 발굴된 것으로 죽은 이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어 함께 넣은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황남대총에선 금팔찌가 출토되었는데, 이렇게 금판으로 넓게 만든 팔찌가 발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황금의 나라, 신라. 신라 사람들은 황금이라는 재료를 사랑했다. 그들은 황금 장신구를 좋아했으며, 그 때문에 금세공 기술도 더욱 발달할 수 있었다. 6세기 법흥왕 때에는 '진골들의 말 수레와 말안장을 금, 은, 옥으로 장식하지 말 것'을 명령해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